에이드리언 몰의 비밀일기 (The secret diary of Adrian Mole)
나의 사춘기의 시작, 비밀일기
왠지는 모르겠지만 내 방 책장 한 켠에 꽂혀있던 [비밀일기] 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나에게 호기심으로 다가왔다. 귀여운 강아지와 내 또래의 소년이 쉿! 하는 아기자기한 표지 디자인도 마음에 들었다. [안네의 일기], [키다리 아저씨] 등 남의 일기장이나 편지 글 보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가. 여름방학 숙제로 일기가 한 달치가 밀려서 개학 이틀 전날에 모아둔 신문 보면서 날씨를 확인하고 억지로 지어내고 짜맞추던 나는 안네나 에이드리언이 신기할 뿐이었다. 어떻게 매일 쓸 수 있지? 그러다가 중학생이 되면서 일기는 하루의 일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오롯이 잘 적어둘 수 있는 공간이라는 걸 깨닫고 일기 쓰는 것을 광적으로 좋아했다. 하지만 그놈의 보안 유지가 항상 문제였다. 문방구에서 팔던 자물쇠 달린 핑크빛의 캐릭터 다이어리가 대유행을 했지만 유행을 따라가지 않았던 나는 항상 스프링 노트에 일기를 썼으니까. 지금도 일기는 몰스킨 다이어리에 써야 제맛이라고 생각한다. 두번째로 나는 관종끼가 있어서 비밀일기지만 누군가가 봐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일기를 썼다는 게 문제였다. 이 모순은 여전히 극복되지 않는다. 아무튼 그래서 밤늦도록 끄적인 일기는 다음 날 아침에 지우개로 북북 지워버리거나 찢어서 쓰레기통에 넣어버리기 일쑤라 일기를 자주 쓰지 않았다. 싸이월드 다이어리는 지우개로 지우거나 찢어버리는 수고를 덜어줄 뿐만 아니라 창피한 글도 삭제를 누르면 빠르게 지울 수 있어서 좋았다. 대신 요즘은 캡처라는 무시무시한 기능 때문에 쓰기 전에 엄청 고민해야 한다는 거. 아무튼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같은 소년의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읽어내려갔던 [비밀일기]는 나의 사춘기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기 나이를 열 세살 하고도 4분의 3이라고 쓰는 에이드리언은 내 사춘기와 너무도 닮아있다. 사람은 누구나 사춘기를 겪기 때문에 찌질하고 불우한 이 소년의 이야기에서 공감을 형성한다. 단순히 사춘기 소년의 감성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당시 영국의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블랙 코미디가 난무한다.
나의 친구 에이드리언 몰
에이드리언 몰은 영국 레스터 지방의 중하층 계급의 부모 밑에서 외동 아들로 크는 소년이다. 아주 감수성이 풍부하며 술을 좋아하고 꽤 방탕한 삶을 살아가던 부모님과 달리 깔끔하고 단정한 삶을 갈망한다. 엄마는 옆집 아저씨와 바람이 나고 아빠도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다. 실업자가 된 아버지 때문에 가난을 겪지만 자신의 현실에 대해 적나라 하게 묘사하고 지식인이 되고 싶어서 열심히 시를 쓰고 책을 읽고 일기를 적는다. 이렇게 적어보니 에이드리언 몰의 십 대는 절망적이지만 일기의 내용은 비극와 희극을 오간다. 에이드리언의 찌질한 면모가 주는 슬픈 웃음이라고 해야 할까. 학교 불량배에게 학교 폭력을 당하지만 나이 든 할머니가 그를 꾸짖고 빼앗긴 돈을 돌려받기도 하고 부모님이 이혼한다는 소식에 자기 얼굴이 신문 1면에 실릴 수 있는데 그 전에 여드름이 나았으면 하는 소망은 귀엽기까지 하다. 우유 배급소 사무원 아빠를 둔 예쁜 여자친구 판도라에게서 느끼는 열등감과 동경을 자신이 지식인이라는 허세를 떨면서 BBC에 계속 자신의 시를 보낸다. 1권의 마지막은 경주용 비행기를 조립하다가 본드 냄새를 맡고 싶다는 호기심에 사로잡혀 본드 냄새를 맡다가 비행기가 코에 붙어버린 채 병원에 간다. 너무 웃긴데 가끔 내 모습 같아서 마냥 웃을 수 만은 없는 이 느낌. 에이드리언 몰의 찌질의 역사가 가진 매력이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되지 않았던 당시에 (이메일 계정을 만드는 실습을 학교에서 배웠고 그 메일 계정을 아직까지도 쓰고 있다.) 사춘기 시절의 아이들에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컨텐츠는 거의 없었고 비밀일기에서 나타나는 에이드리언의 성적인 호기심과 욕망(?)을 속으로는 까면서도 내심 동감했던 기억이 있다. 성에 대해서 처음 접했던 책인 것 같다. 어쩌면 그 당시 청소년들에게 성이나 연애에 대한 호기심을 유일하게 가지게 해준 책일지도 모르겠다. 블로그 후기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다들 두근두근하며 성적인 부분을 읽었다고 한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지!
에이드리언 몰을 통해 한국의 초등학생이던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1980년대 영국 사회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낸시 레이건이라던가 다이애나 비의 결혼식, 영국의 포클랜드 침공 등 교과서에서 본 듯한 사건이 당시 현실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그런 뉴스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그리고 마가릿 대처 수상의 정책에 대한 비판 등이 책 곳곳에 아주 심술궂고 유쾌하게 적혀있다. 어릴 때에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들이었지만 순수한 소년의 눈높이에서 적었기 때문에 뉘앙스를 파악하고 피식 하고 웃었던 기억이 있다.
이 책의 저자 수 타운젠드 (Sue Townzend)는 여성 작가로 영국의 노동자 계급으로 태어나 에이드리언 같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경험을 살려 비밀일기를 집필했고 무려 여덟 권이나 되는 시리즈가 나왔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시리즈 중간에 타계하시는 바람에 나머지 시리즈는 그 아들이 이어서 썼다고 한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작가 조앤.K.롤링은 그녀의 죽음에 슬픔을 표하며 이 책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나도 그렇다. 이 책은 종종 생각난다.
어른이 된 에이드리언 몰의 이야기
7년 전 강남 교보문고 영어 원서 코너를 기웃거리다가 (원서 코너라니...순전히 허세였다) 너무나 반가운 제목을 발견했다. 하지만 표지에 틀니를 담궈놓은 컵이 있어서 몇 초 동안 이 책과 이 그림이 무슨 연관이 있나 하고 생각하다가 혼자 빵! 터졌던 기억이 있다. 에이드리언 몰의 선한 사마리아인 클럽에서 노인 돌보기 자원 봉사로 만난 아흔 살의 노인 버트 박스터씨의 틀니인 것 같다. 집에 와서 읽는데 어릴 때 얼마나 많이 읽었으면 술술 읽었던 것 같다. 다만 내 기억속 94년 번역판이 조금 올드하기도 했고 속편이 궁금해서 교보e-book으로 1~4권 시리즈를 결제했다. 2권은 1권의 속편으로 에이드리언의 상황이 더욱 골때린다. (Spoiler Alert!) 3권은 에이드리언의 일기와 편지글, 작가 수 타운젠드의 여행기나 일상 글이 실려 있어서 재미있다. 에이드리언의 일기에 작가가 개입하는 유머를 보여주어 더욱 신선하다. 4권은 성인이 된 에이드리언의 처절하고 더 찌질한 이야기가 쓰여져 있다. 다소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부모님에 대한 심정과 깐깐한 노친네로 나오지만 그를 아껴주었던 할머니의 죽음, 마침내 일과 사랑을 찾아가는 에이드리언의 짠한 성장기를 보면서 여전히 공감했다. 서른 살이 훌쩍 넘어버린 나와 어른이 된 에이드리언의 고뇌가 맞물리면서 오래된 친구를 응원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 앞에서 지식을 뽐내며 말하면 이 마음이 급속도로 사라질 것 같다.
나의 비밀일기
바쁘게 살다보면 두꺼운 다이어리는 필요가 없어진다. 위클리나 먼슬리 다이어리를 갖고 다니면서 일정이나 해야 할 일, 목표들을 적는다. 내가 한 일, 누구를 만난 일. 기껏해야 스마트폰 갤러리에 있는 사진들로만 위안을 삼을 것이다. 에이드리언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나의 찌질함까지도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바라보면서 일기를 써야겠다. 매일 꾸준히 쓴 일기가 나를 성장시켜 줄 뿐만 아니라 멋진 노래 가사로, 문학 작품으로 나올 지 모르는 일이니까. 멋진 책이다.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십 대에 접어들 무렵에 슬쩍 추천해줄지도 모르겠다. 에이드리언의 말처럼 13살 하고도 4분의 3의 나이면 사랑을 하게 되는 나이니까 :)
7월 20일 목요일. 의사는 기분이 괜찮으면 내일부터 학교에 가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난 학교에 가기 위해 기분이 괜찮아질 생각은 없다. -The secret diary of Adrian Mole 1 중